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인 이야기/비판 (문단 편집) === 리메스 === 12, 13, 14권에서 계속 반복되는 문제점. 4세기 이후 로마 제국이 선방어 전략을 포기하고 종심 방어 전략을 채택한 것은, 로마 제국 자체의 내적 역량이 약화된 탓도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국경 지대 자체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이전과는 달리 갈수록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것이 파밀리아라는 개념의 쇠퇴라고 설명하지만 근거없는 해석이다. 애초에 시오노 나나미가 주장한 '리메스', '안전한 국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는 '얼마 안 되는 최전성기 동안' 로마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만 가능했던 '''이상적인 조건'''일 뿐이며, 이것을 전반적인 '로마의 대전략'이나 '제국 성립 기본 조건'으로 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틀린 얘기다. 적이 국경에 들어온 다음에야 요격하는 체제가 문제라고 거듭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3세기 때처럼 일단 방어선이 뚫리고 나면 적에게 강요하는 희생은 거의 없는 채 발칸 반도에서 뚫린 타격이 아테네까지 그대로 가는 상황은 정상적인가? 심지어 오현제 말기에조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s-2.5|게르만족의 대규모 공세에 방어선이 뚫린 일]]이 있었을 정도다. 선방어를 하기 위해 로마군은 예방전쟁을 해서 국경을 지켰다는 근거를 들기도 하나 예방전쟁 역시 국가적으로 엄청난 물자가 투입되므로 단지 국경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이런 전쟁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오현제 시기에 로마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상황과 야만족이 전반적으로 분열되었다는 상황이 겹친 한정된 조건에서 가능했던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 군사학적으로 '''선방어는 존재하는 모든 방어전략 중 가장 많은 고정지출과 인력지출, 최악의 효율과 가장 낮은 효용성을 보이는 방어전략이다.''' 종심방어가 아닌 선방어를 강요받는 상황이 아니라면[* 일례로, 현대 한국의 휴전선에 대한 선형 방어는 휴전선이 뚫리는 바로 그 순간 북한군이 종심인 서울에 진입해버린다는 전략적 열세 때문에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부산이나 광주가 한국의 수도였다면 어차피 뚫고 들어와 봐야 [[시가전|경기도에서 돈좌당할]] 북한군 상대로 지금 같은 징병제는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프랑스는 저지대가 점령당하면 파리가 코앞이라는 약점 때문에 마지노선과 에미엘 요새의 건설을 강요받았고, 그것이 얼마나 무용한 전략이었는지도 스스로 6주 만에 패망하며 똑똑히 입증해 보였다.] 지휘관에게 선형 방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반론에서 적군을 섬멸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포위섬멸이며, 방어자가 공격자에게 포위섬멸을 강행하기 위해서는 전선 일부를 개방하여 파고들도록 유도한 후 후방을 촌단하여 싸먹는 전술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격자가 파고들었을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종심지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종심에 방어전력을 빽빽히 박아두고 [[공세종말점|적들의 기동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한꺼번에 공격하여 섬멸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방어측이 엄청난 승리를 거둔 전투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유럽이 이슬람 세력에게 거둔 최대의 승리인 [[2차 빈 공방전]] 당시에는 빈의 요새가 앞에서 버티고, 그 후방으로 윙드 후사르가 파고들어 오스만군을 포위섬멸했다. 오스트리아의 국경에서 저지한 것이 아니었다. 통일 제국 하나를 청천강에 장사 지내 버린 [[살수대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수나라군의 별동대가 압록강을 건너 평양까지 파고들었다가 퇴각하며 도강하는 것을 포위섬멸한 결과물이다. 결과적으로는 패했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을 가장 크게 경악시켰던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전과 역시 상륙하는 미군을 해안선에서 저지한 것이 아니라 섬 내부에 토굴을 파고 지하에서 항전한 결과다. 반면 상술한 것과 완벽히 동일한 조건에서 선방어를 고집한 집단은 모두 패망했다. 똑같이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요새에서 격돌했던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비잔티움은 어마어마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선방어를 기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오스만은 비잔티움을 패망시켰다. 고구려가 살수대첩 당시 평양까지 뚫렸던 것을 두려워하여 구축하였던 요동의 [[천리장성]]은 당태종의 공격에 요동성, 백암성, 박작성 등이 우후죽순 무너졌고, 전방 종심이 부재했던 결과 [[주필산 전투]]로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패퇴했다. 결국 당태종을 막은 것은 [[안시성]]과 [[신성]]이라는 2차 종심이었다.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막겠다고 유럽 해안선 전체에 [[대서양 방벽]]을 구축한 나치 독일의 방어선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단 한 번에 돌파당하고 이후 나치 독일은 패망하는 데 2년도 안 걸렸다. 상당히 잘나가던 공화정 시절조차 로마는 선방어로 저지한 적은 가뭄에 콩나듯 하였고, 적군이 방어선을 뚫고 분탕질을 친 뒤에야 비로소 수도에서 군단을 징집한 다음 집정관이 출정하여 제압한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아우구스투스와 오현제때 선방어가 성공한 것으로 보인 이유는 선방어의 위력이라기보단 게르만족의 정세와 아우구스투스때 벌인 대규모의 게르만 원정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만 원정은 워낙 유명하고, 네로의 전임인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는 코르불로의 지휘 하에 대규모로 게르만 원정을 단행한 일이 있었다. 또 오현제 시대로 넘어간 이후에는 먼 게르만족과 가까운 게르만족의 전쟁으로 이들이 로마를 넘볼 상황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오현제]] 시대에도 주기적인 정벌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카라칼라 황제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말기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방어선을 다시 보강하고 게르만족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갖추기 전 연이어 격파함으로써[* 카라칼라는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재능은 훌륭한 편이었다. 정치적 재능이 전무한 것이 문제였지만.] 선방어 체제가 3세기 중반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그 이후에는 게르만족의 거대한 물결을 갖추는 것을 막지 못해 선방어 붕괴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시오노 나나미의 말대로 로마가 선방어 전략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선방어로는 도무지 국경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 같이 진격로가 극히 한정된 준 산악지대 같은 곳이 아니면 현대전에조차 선방어로 적을 막지 못하는데 고작 10여만(대략 20개 군단. 나머지는 동방과 후방)을 지금의 유럽 서쪽부터 동쪽 끝까지 길게 늘어뜨려 어떻게 선에서 적을 격퇴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병력을 무제한적으로 늘릴 수도 없으니 결국 로마는 선방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로마 제국 바깥의 야만족들은 지속적으로 사회 조직도와 편제가 발달하여, 장교단과 부사관단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의 숙련도 또한 상승하고 있었다. 이는 전술과 전략 숙련도가 우수해진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하며, 때문에 대규모 야전에서도 더 이상 로마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물량과 체계적인 군사학이란 분야에서는 로마보다 쳐질 수 밖에는 없었으나 이들은 카이사르 시절의 그 야만족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상대해야 했던 야만족들은 바로 이런 군사 조직들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모르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로는 카이사르 같은 천재적 무장들이 나타나지 않아, 혹은 원수정 로마의 전술을 버려서 로마가 고전했다는 이상한 결론 밖에는 내지 못하는데, 다른 사항이야 특유의 반기독교 유심론적 사관과 배치되어 납득이 안 되었다곤 치더라도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건 자료 조사의 불성실을 나타낸다.[* 물론 이미 12권 집필 시기부터 여사의 건강 상태가 몹시 나빠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겠지만, 기독교를 까는 부분에서는 여전히 성실한 조사를 보인다는 점을 봤을 때는 매우 의문스럽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